집담회

, 바람, 소리를 담은 수상한 지하

땅과 고도제한이란 조건

전유창 : 풀향기 교회를 처음 봤을 때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교회 건물의 이미지와 무척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애초에 어떤 요구와 조건들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김재관 : 아무래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고도제한이라는 건축법일 겁니다. 설계를 처음 맡게 되었을 때(2004년 3월경)에는 지상 4층까지 지을 수 있었어요. 그때는 주차장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설이 지상에 계획이 되었는데 그 이후 지상 12미터 이하로 건축법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지상부분에 예배를 보는 본당에다가 중층이라고 부르는 발코니 석을 겨우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나머지 시설들은 모두 지하로 가야 했습니다. 건물을 축소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다시 10미터 이하로 바뀌었습니다. 아무튼 이 규정은 경사지 땅에서 더욱 불리할 수밖에 없어요. 말이 10미터이지 지형이 높은 곳에서는 사실상 7미터 이상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결국 건물이 단층으로밖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큰 볼륨을 얻기 위해 지붕을 평평하게 폈고 건물을 대지 경계선까지 넓히다보니, 그것이 바로 건물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지상에 노출된 부분은 전체 규모의 30퍼센트를 조금 넘기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는 지하층에 들어가게 되었죠. 자꾸 건축법을 말하는 것이 좀 옹색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하 교회가 되었던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전유창 : 그런데도 별 어색함 없이 주어진 조건을 잘 이용하신 것 같습니다. 집이 터에 자연스럽게 앉혀졌어요.

김재관 : 무엇보다 땅이 좋았지요. 건축가에게(적어도 나에게)가장 설레는 일은 좋은 땅을 만나는 겁니다. 이곳이 그런 곳이었어요. 대지 경계선은 마치 못생긴 고구마처럼 구불거렸고, 하필이면 길쭉한 끄트머리가 간신히 길에 닿아 있었지요. 또 길이가 100미터도 넘는 땅 중에서 평지라고는 단 한 뼘도 되지 않는 경사지였고요. 그 까다로움이 오히려 매력적이었지요. 또 한 가지는 이 땅만의 탁월한 앉음새였습니다. 땅을 에워싸고 있는 양쪽의 산자락이 부드러운 활의 그것처럼 유연했고, 그 중심으로의 흐름 또한 유려했습니다. 그 흐름은 조그만 개울에 닿았고 건너편의 산자락으로 이어졌어요. 그 중에서도 백미는 멀리 보이는 북한산의 맥락일 겁니다. 그러한 산자락의 흐름과 건물의 방향성이 동일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어색함이 덜 하지 않나, 해요.

낮게, 좀 더 낮게

전유창 : 그런데, 접근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저는 차를 가지고 동측 도내동 쪽으로 들어와서 주차를 했어요. 그런데, 서측의 작은 언덕을 넘어서도 들어올 수 있더라고요. 어느 쪽을 주출입구로 보신 건지요?

김재관 : 그게 참 어려운 부분이었는데요. 법적인 의미의 도로와 실제의 접근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양상은 주변 도시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으므로 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메인과 서브의 개념이 있을 수가 없는 집이어야 했습니다. 어디서든지 접근이 되어야 했어요. 그것이 용이해지려면 건물과 경사진 부지가 잘 연결되어야 하는데 다행이도 바닥이 경사진 예배당의 기능과 잘 부합되었습니다. 그래서 건물의 출입이 쉽습니다.

전유창 : 보통 교회 건축을 보면, 교회의 상징인 십자가가 일반적으로 주출입구에서 입구의 인지를 가능하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풀향기 교회의 경우도 건축가에 의해서건 또는 건축주에 의해서건 십자가가 달려 있는 쪽에 다른 진입부보다 정면성이 부여된 것 같습니다.

김재관 :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도로가 건물보다 더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교회를 오는 사람이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벽이 아니라 지붕이라는 거죠. 말하자면 이 집의 입면은 다섯 개가 되는 셈입니다. 정면을 따로 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또 어느 건물이든 그걸 정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 같고요.

함성호 : 서측 주변으로 계속 주거 단지들이 들어서고 있던데, 그쪽으로의 접근이 쉽지 않겠더라고요. 딱히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지나 접근의 문제가 있을 것 같아요.

김재관 : 집이 산속에 있다 보니, 그런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교회는 그 점을 매우 부담스러워합니다. 약점이라고까지 생각하지요. 하지만 접근에 대하여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는, 이 건물이 주거 시설이나 관공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숲 속에 있는 교회는 접근이 나쁠 수도 있는 반면 그만큼의 깊이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도시 교회가 가지고 싶어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푸름을 배경으로 존재감을 갖는 까만 교회

함성호 : 재료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사실 까만 교회라는 것은 드물죠. 찾아보면 있겠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예요. 어떻게 해서 까만 돌을 쓰게 되었는지요?

김재관 : 재료 설정할 때, 처음에는 보통 이전 설계작이 참고가 되곤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시작은 콘크리트였지요. 그런데 클라이언트가 돌을 제안했어요. 고흥석이었는데, 그것을 절충하는 과정에서 까만 돌, 씨블랙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주변이 녹색의 자연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검은 색은 그 자체로서 존재감을 갖지만 주변에 있는 숲과 나무에게는 좋은 배경이 됩니다. 말하자면 여기서의 검은색은 그 자체일 수도 있지만 주변의 대상을 드러나게 하는 상대적 대상입니다.

전유창 : 마을 쪽에서 진입하면서 건물의 원경을 봤어요. 초록빛을 배경으로 검은 색의 집이 앉혀진 모습은 우리 한옥과 같은 맥락으로 읽혔지요. 날렵한 느낌의 지붕과 가볍게 눌린 듯한 매스에서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가까이서 입면으로 바라봤을 때는 조금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더라고요. 돌의 크기와 물갈기로 인해 반사되는 표면의 질감 때문에 아마도 그랬던 것 같아요. 돌의 마감 자체를 달리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더 거칠게 말이지요.

김재관 : 지적하신 대로 광택을 없애는 방법을 고심했는데 교회로부터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유창 : 결과적으로는 보편적인 재료를 쓰는 것보다 장소의 색이 더 잘 드러나는 작품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김재관 : 예. 맘에 듭니다. 애초의 계획대로 콘크리트를 썼더라면 볼륨이 갖는 장력을 좀 더 강화시키고 싶다는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지하에 대한 이해와 오해

전유창 : 건물 지하 양측의 조경 식재 공간이 지하층의 느낌을 많이 완화시키고 있습니다. 쭉 뻗은 대나무들이 공간을 감싸고 있는데요, 만약 나무가 없었다면 빛이 어느 정도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건조하고 메마른 공간의 분위기가 났을 겁니다.

김재관 : 그랬다면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러고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웃음)(이 날의 집담회는 대나무 숲이 우거진 지하 2층 통로에서 이루어졌다-편집자 주) 교회 사람들도 이 공간을 무척 좋아합니다. 설계자 욕을 하더라도 꼭 이 장소에서 하거든요. 보통 지하층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요인들이죠. 누수와 결로, 곰팡이, 눅눅함, 냄새와 끈적한 어두움들 말입니다. 지하를 기피하는 이유들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러한 요인들이 절대적이지는 않다고 봐요. 거기에 대응하는 뭔가를 만났을 때 그 속성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하층에 대한 기존의 대응 방식은 한결같이 방어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지하에서 생산되는 물이나 습기, 결로 등에 모두 ‘막는다’라는 개념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방수나 차수로 일컬어지는 이 방식은 시간이 경과하면 그 방어력이 점점 퇴화되기 마련입니다. 좀 더 항구적인 대책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막는다’가 아니라 모두 ‘열어 놓는다’는 방식이었어요. 그랬더니 문제가 해결되더군요. 자랑을 하나 한다면 바람이 한 점 없는 날에도 이곳에서는 늘 바람이 분다는 것입니다. 그 바람은 외부에서 흘러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외부와 지하의 상이한 조건들이 열려진 곳에서 만나면서 생성된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지상과 지하의 온도나 습도의 격차가 클수록 바람의 이동이 더욱 활발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곳의 바람은 좀 다릅니다.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죠. 어느 날은 강하게 휘발(揮發, Volatilization)하며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집을 찾는 방문객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지하라는 사실을 잊게 되지요. 오래도록 머물기를 좋아하고, 한참 동안 앉아 있었던 곳이 지상으로부터 7.8미터 아래의 어느 곳이라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의 발명품이 결코 아니에요. 그냥 얻은 것입니다.

전유창 : 지하 2층은 커뮤니티 센터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공공적인 성격을 띱니다. 마치 세상과 교회를 연결해 주는 공간이라고 할까요?

김재관 : 교회에서 중시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니까요.

함성호 : 초기 기독교 교회는 시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그러면서 신성을 추구하다가 고딕에서 그 정점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다시 시장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그게 너무 상업화 되는 것도 문제겠지만, 시장의 역할, 즉 공공성이 강조되는 것에는 긍정적입니다.

기억을 회복시키는 공간

전유창 : 집이 지어진 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를 보면, 건축이 실증적이란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용자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에 대해서 사용 후 평가로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지요. 저도 지금 이 공간에서 지상도 지하도 아닌 굉장히 애매모호한(Ambiguous) 느낌을 갖게 됩니다. 여기 습도는 분명 지상하고 달라요. 그러한 습도감과 함께 빛이 들어오고 나무가 있는 공간에서 제 몸이 반응하여 얻는 느낌이겠지요.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분위기(atmosphere)라는 겁니다. 건축가 피터 줌터(Peter Zumthor)는 시각적인 요소뿐 아니라 소리나, 몸이 느끼는 온도와 습도의 감각 등이 공간의 분위기를 인지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받고 있는 느낌들이 그렇게 형성된 것이고, 따라서 이 공간은 와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설명될 수 없는 느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죠.

김재관 : 여기서 가만히 귀 기울여 보시면, 요 위 수조에서 물소리가 퍼지는 것을 들을 수 있어요. 그 소리가 지하로 내려오면서 상당한 공명을 만듭니다. 또 대나무가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그리고 흙냄새도 납니다. 특히 이 땅의 흙은 그 향기가 아주 강하고 상쾌한데,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 짙어집니다. 좀 시시한 이야기인가요? 그런데 이 흔한 대상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반응을 합니다. 어떤 것이 얼마 만큼이라는 개량적 개념은 별로 안 중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테크놀로지라는 것은 이것들로부터의 성공적인 격리나 차단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의 효과인지 몰라도 이런 요소들에 대한 기억들이 옅어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그것을 다시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게 어디서 맡았던 냄새지?’ ‘이게 언제 들어 봤던 소리지?’ 라고 말입니다. 마치 어릴 적 먹었던 음식을 생각하듯 기억을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그 경험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유창 : 요즘 건축이 시각적인 자극으로 어필하거나 스펙터클한 광경으로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교회를 통해 말하시고자 하는 것들이 의미가 있을 듯해요.

김재관 : 저는 나무, 물, 숲을 아주 좋아합니다. 틈만 있으면 숲으로 들어가고 나무 밑으로 가곤 하지요.

 

기억의 건축 혹은 그것을 넘어서는 건축

함성호 : 언젠가 영화감독 이명세 감독이 이런 이야길 했지요. “영화라는 것은 항상 관객들로 하여금 추억을 떠올리게 해야 한다. 기억이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성공한 영화다”라고요. 물론 흥행적인 면에서 맞는 말이고, 미학적으로 생각할 때도 어느 정도 옳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작가의 전위 그룹들은 그 회상이나 기억들을 왜곡하거나 비틀면서, 혹은 뒤에서 치거나 하면서 나가거든요. 건축도 마찬가지로 시각적인 요소들에 치중해 온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건축들을 추구하다 보면, 아까 말씀하셨던 진부한 것, 그러니까 단지 회상하는 영화냐, 그 회상을 한 번 비튼 영화냐, 그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 봅니다. 거기서 현대 건축이 어느 쪽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혹은 두 개를 행복하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여전히 남을 것 같습니다.

전유창 :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가지 방향이 함께 공존해서 가야 되겠죠. 그것으로부터 개개인의 취향이나 필요에 의해 작가관이라고 하는 부분이 형성되는 것이겠고요.

함성호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과연 건축에 전위가 가능할까, 이런 의문이 강하게 들긴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아까 재료에 대한 이야기를 연장해 보면, 이 건물은 법적인 제약에 의해 단층으로 되었단 말이지요. 그리고 분명히 여기는 접근이 서측으로, 즉 언덕을 넘어 오는 쪽으로 되어야 하는 겁니다. 건축가도 이쪽으로의 접근을 크게 생각한 것이 틀림없고요. 주차는 동측에서 쉽게 뽑았겠지만 일단 정면성은 서측에 둔 게 틀림없어요.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겁니다. 언덕을 넘어 진입한다는 것은 지붕 레벨보다 더 높은 곳에서 들어오게 되는 건데, 그렇다면 아까와 같은 이유로 돌을 썼다면 지붕까지 돌로 마감하여 검은 박스를 만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요. 이곳의 숲이란 게 그렇게 울창한 건 아니지만 여름에는 녹음이 진단 말이죠. 물론 교회가 밖을 보기 위한 공간은 아닐 테지만 완전히 투명하게 하느냐, 아니면 다 막아서 내부로만 집중하게 만드느냐 했을 때 소장님은 후자를 선택하신 겁니다. 그런데 위에서 딱 내려다 봤을 때 검은 벽면과 부분적으로 사용된 제물 치장콘크리트가 부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검은 벽면에서 제물 치장콘크리트가 사람이 걸어가는 속도대로 서서히 삐져나와야 하는데 그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죠. 돌이 반짝거려서 그러는 건가? 하는 생각도 해 봤어요. 그런 면에서 지붕까지 돌로 마감했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비용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요.

김재관 : 그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에 자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논리도 만들어지지 않더군요. 집을 지을 당시에는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다른 부분에 더 많은 신경을 썼을 겁니다. 가령 공사비라든지, 막강 파워의 현장 소장과의 관계라든지, 교회가 허용할 수 있는 현실적 한계점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

반드시 해소되어야 하는 욕망들

전유창 : 건물 내부의 색이나 전등을 보면 인테리어에 건축가의 의견이 반영된 것 같지 않습니다.

김재관 : 처음부터 인테리어는 다른 사람이 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었지요.

전유창 : 슬픈 현실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건축가가 건축물의 외관(exterior)에서 가구까지 하나의 완결된 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느 부분이 막혀 버리는 상황이잖아요. 건축을 하나의 실재적인 독립체(Entity)로 이해할 때, 이를 이용하는 사용자에게 일관된 경험을 유도한다는 면에서 건축가로서 많은 아쉬움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다른 사람에 의해, 다른 의도로 마무리되어서 그런지 확실히 외부 공간과 내부 공간이 서로 부딪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김재관 : 별로 슬프진 않습니다.(웃음) 저는 기본적으로 건물의 설계는 건축주와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옛날보다 그런 생각들이 훨씬 더 강해졌지요. 더구나 집을 짓는데 가담한 사람들의 욕망이 건축을 통해 해소되지 않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고 봅니다. 이를 테면, 건축가가 손을 떼는 순간 구현된 모든 것이 변경되거나 심지어 철거되어 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런 경우 건축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진 찍고 돌아서서 ‘무지한 것들’ 이라고 욕지거리하는 것뿐이지요. 건물이 다 지어진 후 그 건물을 다시 보러 가는 것이 두려운 현실이 오히려 더 슬픈 것 아닐까요? 저 또한 저의 의지가 반영된 집을 짓고 싶습니다만 그것 때문에 배척받는 건축가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절충이나 양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동의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집이란 욕망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그것의 해결이고요. 건축가는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두를 독차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에 동의를 전제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가 생기면 저는 제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부분과 그들의 요구를 교환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집의 인테리어에 대해 강하게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어요. 나의 개입을 원치 않는 사람들과 다툼이 싫었고, 건축주에게는 어떤 채무감을 갖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설계한 당사자의 침묵은 가끔씩 유효합니다. 좀 미안한 일이잖아요. 이런 복잡한 생각들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는 이 교회가 건축가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는 직영공사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건축가가 시공자로부터 허락과 검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거의 모든 것들이 공사비와 시공성을 담보해야만 했고, 그들이 허용하는 가치 내에서 제안을 해야만 받아들여지는 시스템이었다는 겁니다. 괴로운 노릇이지만 이러한 조건에서 방법을 찾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마음대로(masturbation)’처럼 싱거운 일은 없잖아요.

전유창 : 에이드리언 포티(Adrian Forty)는 『욕망의 사물, 디자인의 사회사』란 책을 통해 디자인이란 것 자체가 장인의 개인적인 취향은 아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많은 부분이 사회와의 관계와 그 영향력을 받아들임으로써 진화해 왔다는 말이지요. 그것과 관련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방금 언급하신 것이 건축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도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건축은 클라이언트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고 또 클라이언트와 공조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또한 건축가와 클라이언트는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자연히 건축가의 의지에 반하는 부분들이 많이 발생하지요. 바로 그 지점에서, 사회적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은 결국 건축가가 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 얼마만큼 열려 있는가, 얼마만큼 믿음을 줄 수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건축가의 역량에 대해 믿음이 있다면, 또 건축을 문화로서 하나의 작품 활동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건축가의 책임의 범위는 넓어지고 건축가가 일을 맡았을 때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겠지요. 다시 말해 건축가가 전체를 코디네이트(coordinate)하는 사람이란 인식이 형성되었더라면 훨씬 더 나은 공간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김재관 : 이해는 하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앞서 말한 내용이 너무 전략적으로만 비춰진 것 같은데, 그보다도 사람들이 이 집을 만드는 데 가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가령 저 식당에서 사용된 페인트의 색깔도 이상하고 걸레받이의 높이도 너무 둔합니다. 천장 색깔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도 그걸 통해 그들의 욕망이 해소되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포트레취에 동참까지 한다면 더 좋아집니다. 전 지금 선(善)이나 나눔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고, 확실히 욕망이 해소되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그 기쁨이 나에게 전이된다는 것이고 동시에 그것은 새로운 촉매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뜻대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건축가적 관성이 나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전유창 : 실무를 하다보면 밀고 당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는데, 어떤 부분은 내주면서 자신이 지켜야 할 부분은 견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는 거겠죠? 주로 교육 시설 같은 공공건물의 설계에 참여한 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전체적인 큰 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부분들과 그 외의 부분들을 융통성 있게 같이 디자인해야 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요.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건축가의 또 다른 모습

함성호 : 건축가에게 좀 더 많은 재량을 줘야 한다고 그러잖아요. 저는 그것은 건축의 촌스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이나 다른 예술 분야에서는 더 낮은 예술가를 지향하지요. 공공미술 쪽에서도 예술가라는 옷은 벗어버립니다. 삶 속으로 들어가 섬소년들과 함께 조개잡고 그림 그리는 작업들을 한다고요. 그 사람들을 두고 우리가 고전적 의미에서의 예술가라고 부를 수는 없거든요. 하지만 그 사람은 그걸 기꺼이 받아들이죠. 삶 속에서의 예술가라는 거예요. 그런데 반대로 건축가는 모든 걸 다하기를 원합니다. 건축은 왜 다른 예술과 반대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김 소장님의 홈페이지(moohoi:8888)에는 이 교회를 하면서 일어났던 일들이 쭉 정리되고 있는데, 그걸 읽어 보면 별 일들이 다 있지요. 거기서는 건축가가 자기주장을 어떻게 관철시켰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들과 어떤 방식으로 과정을 이끌어 나갔느냐가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제 건축가의 작업은 뭔가를 창조하기보다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무엇을 존재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 그 관계만 맺어주면 건축가의 역할은 끝나는 거지요. 그게 좀 더 다른 모습의 건축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유창 : 같은 맥락일 수도 있겠는데, 클라이언트나 사용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발현(educe)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건축가의 일이겠죠. 건축가가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들이 몇 있지만, 단지 집을 짓겠다는 것이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그려서 드러내 주고 참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으로 대안(alternative) 만들기를 강조하고 있어요. 가장 최적화된 선택을 유도하는 것이죠.

김재관 : 많은 사람들이 건축주가 모르면 설득을 해야 한다고 나에게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설득’이란 상대편 생각을 내 생각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인데요, 썩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시도하려는 사람은 이미 눈이 다르거든요. 그렇게 되면 건축주는 ‘아 저 사람이 내 마음을 바꾸려고 하는구나’ 생각한다는 것이죠. 들키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태도를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식의 설득은 실패를 하거나 오히려 문제를 잠복 상태에 놓이게 합니다. 그건 해결이 아닙니다.

전유창 : 김 소장님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갖게 되셨는지요?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김재관 :아주 조금씩 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0여 년 전쯤인데요. 제가 지정해 준 페인트 색깔을 바꿨다는 이유로 굉장히 화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벽을 걷어차는 바람에 다리에 깁스를 하게 될 정도였지요. 그때였던 것 같아요. 나에게 그런 오더(order)를 내리는 그 무엇에 대해 나 자신만의 정의가 없으면 안 되겠다, 라고 생각한 것이요. 타인으로부터 이식된 신념으로 인해 또 다시 나의 다리가 부러져서는 안 되잖아요. 저는 건축보다 저의 행복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무슨 이슈거리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전유창 : 저는 더욱 이슈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고, 개인적인 에피소드일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보편적으로 발생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죠.

이분법적 특징과 건축의 최적화

함성호 : 다시 화제를 돌려서, 김재관의 교회 건축을 한 번 되짚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김재관의 건축은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코아는 코아끼리, 또 나머지는 나머지끼리 분리되어 있어요. 또 항상 기계 설비 라인들을 한쪽으로 몰아 놓죠. 모든 프로젝트에서 거의 그런 식이에요. 성만교회 같은 경우는 두 개의 코아가 입면처럼 나뉘어져 새까만 모습으로 서 있어요. 아예 코아가 배 밖으로 나온 형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누다 보면 공간이 단조로워질 수 있는 단점이 있어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김 소장님은 빛의 문제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데, 왜냐면 빛이란 건 떨어지는 각도에 따라 매우 다양한 표정을 보여 주기 때문이지요. 성만교회 이전에는 빛을 지하-지상도 물론-로 쭉 끌어들이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어요. 사실 굉장히 오랜 실험의 결과예요.

풀향기 교회에서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수법들을 여전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의 것들과 좀 다른 점은, 많은 계단들로 상하 공간을 이어주면서 지상과 지하를 명쾌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상에 본당 용도의 박스를 하나 놓고, 밑으로 내려오면 그런 단순한 공간과는 반대의 풍성한 공간이 연출되어 있어요. 중이층도 걸려 있고, 공간에 따라 레벨 차이도 다양하지요. 소예배실도 시선을 따져 보면 굉장히 풍성한 공간이 나오거든요. 위는 단순, 아래는 복잡, 이런 식의 구분이죠.

김재관 : 덧붙여 설명하면, 어떤 부분에서는 결벽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이런 통로나 복도, 동선의 흐름 등을 구축할 때 전기, 설비, 구조 시스템을 모두 정확하게 맞춰야 한다는 것이죠. 설비 라인을 한 쪽으로 모는 겁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답이 찾아질 때까지 계속 스터디(study)를 해서 통합되는 결정적인 루트를 찾는 식입니다. 여기 앉아 있는 이 공간도 바람이나 빛의 요소, 설비, 전기, 사람 등, 이 모든 것이 모일 수 있게 의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 전 그것을 기본적이고 당연하다고 보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결벽입니다.

전유창 : 그것은 건축가와 건물이 운용되는 방식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입니다. 미국에서 실무를 할 때, 디자인뿐만 아니라 시공과 코디네이션, 즉 전기, 설비 이런 것들을 최적화시켜서 건물의 시스템을 잘 맞추는 일이 건축가의 중요한 업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제가 다녔던 사무실이 특히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글을 쓸 때도 건축의 최적화와 효율성이란 부분을 늘 염두에 두어야 했지요. 사실 그런 시스템이 정리되지 않으면 디테일이 엉성하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또 공간 자체의 분위기를 맞추는 데도 그런 세세한 것들이 틀어지기 시작하면 원하는 공간의 느낌이 나오기 어렵겠죠.

쓰임새 있는 빛, 텍스처로서의 빛

함성호 : 아무튼 아래쪽의 복잡한 공간에 이번에는 빛이 대나무를 타고 유입됩니다. 전에는 그냥 벽을 타고 들어왔지요. 신화적 상징으로서의 나무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매개입니다. 수직으로 쭉쭉 뻗은 대나무가 위를 향하고 있다면 빛은 아래로 떨어지지요. 또 예전에는 지하 공간에 빛이 들어오더라도 단순하면서 엄숙한 느낌을 주었는데, 나무를 타고 빛이 들어오니까 한층 느낌이 부드러워졌어요. 그리고 물소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소리들이, 특히 여기는 숲이 많아서 그런지 더 잘 들리고요. 이런 공간을 사운드 스페이스라고 그러던데요,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소리를 느끼는 공간이라는 거죠. 아무튼 성만교회가 마치 지하가 지상으로 확장되는 것을 보여 준다면, 풀향기 교회는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그래서 지하의 풍성함이 연출되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유창 : 공간의 위계(hierarchy)가 거의 없는 듯한 것도 빛과 관련이 있을 듯싶은데요. 이곳은 제가 본 교회 중에서 가장 밝은 교회가 아닐까 해요. 그러한 밝음이 기존의 교회와는 다른 느낌의 교회, 즉 공공성이 좀 더 강하게 구현된 교회를 만드는 것 아닐까, 생각됩니다. 보통 교회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위계가 분명하고, 밝기나 분위기를 통해 다른 세계로 끌어들임을 연출하지요. 하지만 여기는 공간의 특질들에 대한 빛의 느낌들이 굉장히 유연하게 흘러 다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하도 그렇고 지상도 그렇고, 위계에 대한 개념 없이 말이죠. 그런 면에서 빛을 다루는 방식이 건물의 성격하고 일치한다고 볼 수도 있을 거예요. 건물 자체가 실용적이고 공공적인 성격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빛도 과장되지 않게, 밝기를 위해 쓰인 듯합니다.

김재관 : 실용을 말씀하셨는데 듣고 싶었던 평가입니다. 쓸모 있는 집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어요. 풀향기 교회에서는 쓰임새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쓰임새가 건강하면 건물도 흉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어요. 마찬가지로 빛도 그런 대상이었습니다. 편안하고 친근한 그런 햇볕 말입니다.

함성호 : 선큰(sunken) 같은 것이 풀향기 교회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에요. 성만교회도 지하처럼 만든 곳의 이중외피 사이로 빛이 떨어지고, 제주도 교회에도 협소하지만 빛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죠.

그런데 그것들은, 말하자면 고딕적인 빛입니다. 그런 드라마틱한 빛의 연출을 능란하게 하시다가 여기서는 조금 다르게 처리를 했어요. 하지만 저는 이곳의 빛도 연출된 빛처럼 느끼는데, 아마 조경 때문인 것 같아요. 대나무가 없었다면 빛이 저런 식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자세히 보시면 아래서부터 그라데이션(gradation)이 되어 있어요. 아래에서 어두웠다가 위로 점점 밝아지는 빛인 거지요. 천상을 지향하는 빛 같은 것입니다. 고딕의 빛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 꽂힌다면 여기서는 아래에서 위로 퍼져 올라가는 상승감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런 점들이 특이하지요.

전유창 : 실용적인 공간이라고 해도 분명히 공간의 느낌들은 표현되어 있어요. 차갑거나 따뜻하거나 부드럽거나 관능적인 공간들을 표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건축가가 만드는 공간은 그런 느낌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할 거에요. 결국 그것이 사용자와 건축주가 교감하는 부분이거든요. 그런 공감의 느낌 때문에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거고요.

깔끔한 문장이 주는 감동

김재관 : 아까 함 소장님이 이야기하신 이분법적이란 표현은 매우 정확한 것 같습니다. 성만교회는 코아가 배 밖으로 나와 있는 것 같다, 라고 표현하셨는데, 그렇죠. 거꾸로 이야기하면 속을 다 비워버린 거지요. 거치적거리는 것들은 바깥으로 빼놓고 안을 비운 상태에서 뭔가를 시작하는 거예요. 사실 그러한 구분의 수법들은 아주 쉽지요. 그러면 결국 비워진 것과 바깥으로 나간 것이 형태적으로 드러납니다. 저는 그것을 명쾌함이라고 불렀어요. 그 말이 틀리지는 않겠지만 옳다고 볼 수도 없을 거라고 봅니다. 변명을 좀 더 하자면, 저도 교회 건축을 조형적으로 다루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또 한때는 반대로 조형을 없애버린 적도 있었고요. 어느 민박집은 기능만 살려서 설계한 적이 있었는데, 기대했던 명료함은 없고 오히려 건조함만 남더군요. 뼈다귀가 서 있는 것처럼 말이죠. 저는 이 양극단을 경험하면서 조형을 다루는 솜씨가 굉장히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니라고들 말합니다만 조형은 건축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조형이라는 것은 형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냐는 것이지요. 조형은 형태뿐만 아니라 공간의 조직과 배분, 그리고 느리고 빠르게 하는 흐름과, 끊고 맺는 적절함 모두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풀향기 교회가 실용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그것이 조형을 배제한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어쨌건 저는 그 부분에 미숙하며 또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붙잡고 살 테니까요.

함성호 : 조형에 재주가 없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건축을 볼 때 생기는 오해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건축은 조형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건축의 미학적인 요소들은 다르게 다뤄져야 한다는 건데, 그게 뭐냐면, 순전히 저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하나의 문장으로 따지자면 김 소장님의 건축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좋은 문장이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것은 절실해야 된다, 정확해야 된다, 아름다워야 된다, 이 세 가지거든요. 그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하라고 한다면 거의가 절실함을 택해요. 그런데 미술이나 디자인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택해요. 그런데 건축하는 사람들은 정확함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결국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는 거죠. 아름다움은 어디서 나오는가, 문학에서는 절실함에서 나와요. 절실하니까 정확해지려고 하고 정확해지니까 아름다움은 저절로 나오는 거예요. 미술하는 사람들은 일단은 아름다워야 하니까 아름다움에 전력을 다해요. 아름다움에서 정확해지고 절실해지려고 그러죠. 근데 건축하는 사람들은 정확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정확해지는 것이 얼마만큼 절실한가 할 때 아름다움이 나오는 거지요. 건축이 이제까지 형태에 집착해 왔던 것은 건축을 미술과 같은 조형 예술로 오해해 온 결과입니다. 이제 우리는 건축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다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다른 언어가 필요한 겁니다. 김 소장님은 화려체 문장이 아니라 정제되고 깔끔한 문장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울려 줄 수 있어요. 이분법 자체가 수식어가 없단 이야기인데, 그와 비슷한 것이 전통건축이지요. 조선의 반가들이 명쾌하고 모던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주어, 동사, 명사로 끝나는 김 소장님 건축에서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아마도 조사일 겁니다. 매우 중요한 것이죠. 그리고 그 조사는 빛이 아닐까 해요.

다음 작품에서 기대해 볼 수 있는 것

함성호 : 유걸 선생과 김수근 선생의 교회 건축을 통해 김재관의 교회 건축을 읽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 교회 건축에는 유걸 선생의 강변교회처럼 천장에 유리를 깔아서 천상을 구현시키는 경우도 있고 김수근 선생의 경동교회처럼 폐쇄된 공간과 빛으로 지상이 들려지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데 김재관의 교회에는 그 두 가지가 교묘하게 섞여 있는 것 같아요. 전혀 개방적이지 않은 본당의 벽과 천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빛에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망설임일 수도 있겠는데요, 그렇다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많이 해본 놈이 장땡이란 말이 있어요. 실패를 하던 성공을 하던 간에 많이 만들어본 사람이 성공한다는 거죠. 김 소장님은 지금까지 교회 건축을 10여 개 가까이 하셨는데, 꾸준히 더 많은 것을 하실 생각이시죠?

김재관 : 최근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를 의뢰받은 적이 있어요. 건축주의 첫 질문이 스타일이 있느냐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없다고 했죠. 그때그때 다르다고요. 알고 보니까 건축주는 이미 여러 건축가들을 만났는데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이란 게 말도 안 되는 요구고, 건축가는 그런 양식을 재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반응이었데요.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구요. 처음엔 저도 황당한 경우라 생각했지만 해보니까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더라고요. 내가 이상한가요? 하하.

정리/정귀원(본지 편집장)

 

김재관

1962년 충청북도 옥천의 무회마을에서 태어난 산골 출신 건축가다. 그래서인지 그의 마음에는 나무, 물, 숲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건축가 곽재환의 조수로 설계 일을 배웠으며, 영국의 옥스퍼드 브룩스 대학교에서 석사를 한 후 런던의 홉킨스 설계사무실에서 일했다. 현재 무회건축연구소 대표이며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하는 등 한때는 작가적 관점에서 건축을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떤 종류의 건축이든 편견 없이 보는 태도를 지지하며 건축물을 자신의 개인적 작품으로 여기거나 건축주를 자신이 설계한 건물을 관리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다. 근래에는 스스로의 건축적 재능이 탁월하지 못함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유유히 산다.

함성호

시인이며 건축가다. 강원도 속초 출생으로 강원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1990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 『성 타즈마할』, 『56억 7천만년의 고독』, 『너무 아름다운 병』과 산문집 『허무의 기록』, 만화평론집 『만화당 인생』, 『건축의 스트레스』 등의 책을 썼다. 시 쓰는 선후배들과 <21세기전망> 동인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요즘은 개인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방송에도 출연하고 있다.

전유창

아주대학교 건축학부 조교수. 인하대학교 건축과와 대학원 연구실(Factory)를 거쳐 미국 Columbia University 건축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99년부터 2008년까지 뉴욕 Mitchell | Giurgola Architects LLP에서 디자이너 및 이사로 재직 하였으며 일본 신건축사 주최 센추럴 글래스 국제 공모전 1등상과 2000년 일본 신건축 주택 공모전 가작을 수상하였다. 미국 건축가 협회(AIA) 정회원이고 LEED AP. 이다.

 

  • Project Type Church
  • Project Year 2008
  • Location Jeju-si, Jeju-do, South Korea
  • A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