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간 와이드 기고 건축가 곽재환 인물기행 ‘나의 보스’, 2008

An Article, ‘My Boss’, Magazine Wide Architecture Report No. 1, 2008

 

나의 보스

충청도에서 쓰는 말 중에 ‘가직끈’이라는 사투리가 있다. 이 말의 뜻은 ‘이미 충분한’ 혹은 ‘최고’ 라는 최상급의 의미로 사용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출세를 하면 이를 두고 ‘그 사람 가직끈 됬다’라고 하고 배부르게 밥을 먹고 나서도 ‘가직끈 먹었다’라고 말을 한다. 그렇듯이 사람에게도 이 말을 붙이기도 한다. 만약 건축가 곽재환에게 그 말을 쓴다면 아마 ‘애초부터 가직끈 어른이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자嫡子

1980~90년대 한국의 건축계는 두 사람의 대가가 있었다. 김중업과 김수근 선생이다. 그들에게는 소위 제자라고 불리는 리더들이 있었는데 공간에는 민현식, 장세양, 승효상, 이종호다. 하지만 김수근 선생께선 누구 하나를 지칭하여 제자라고 부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달랐다.

“자네가 이 공간을 이끌어가게 될걸세”

그러다보니 제자 혹은 적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반면 김중업 선생은 제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 듯하다.

“내가 비록 몸이 아펐지만 나의 제자들이 밤을 다퉈가며 알뜰한 안을 만들었고………”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이란 김수근 선생이 말하는 소수의 리더를 의미하기 보다는 직원들에 대한 애칭이다. 그 칭호는 선생의 컨디션에 따라 ‘알뜰한 제자’에서 ‘공룡시대의 콘크리트보다도 못한 대가리를 가진 자’로 둔갑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제외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건축가 곽재환이다. 많은 제자의 무리 중에서 그만을 구분하는 호칭은 바로 ‘곽君’이었다.

“곽君. 어느 날은 높은 사람이 날 부르더니 워커힐 호텔 뒤에 있는 그라나다 홀을 설계하라는 거야. 근데 거기가 머 하는 곳인가? 알다시피 그렇고 그런데 자나. 서양 것들 불러다가 말이지. 그걸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말이지. 당장 거절을 했지 머야. ”

“꼬르뷔제 선생님과 챤디갈에 있는 의사당건물을 할 때였어. 그걸 내가 맡았거든. 어느 날 오셔서는 지붕을 공중에 띄우자고 하시는 거야. 그 무거운 걸 말이지…..”

마치 아들을 대하듯 살가움이 느껴진다.

이사를 다닐 때 그가 직접 챙기는 물건이 있다. 그건 바로 중판사이즈의 검은 파일과 똘똘 뭉친 서류꾸러미들이다. 그 속엔 선생께서 불란서 말을 공부했던 단어장도 있고 꼬르뷔제와 나눴던 이야기가 적힌 일기장과 피카소 풍의 습작들로 가득했다.

“살고 싶어져야 하쟎은가? …….”

그리고 도면들이었다. 평화의 문, 케이비에스 방송국, 육군박물관…. 김중업 선생의 후기 작품들로서 보스 직접 그린 그림 들이었다. 특히 ‘평화의 문‘ 스케치에는 흑연의 광택들이 아직도 낭자했다. 보스는 그 유품들을 참으로 아끼셨다. 지금도 김중업 선생을 말할 적이면 표정부터 공손진다. 말하자면 그 둘은 서로를 ‘가직끈’ 대한 것이다.

첫 대면

1980년대초 큰 건축계의 가장 큰 이슈는 독립기념관 현상설계였다. 그 당시 설계로 밥을 먹는 사람이라면 국민의 의무인양 응모했던 큰 행사였다. 그러나 김중업 건축연구소는 선생께서 심사위원이었기 때문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보스는 하는 수 없이 개인의 자격으로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과 합작을 하며 만나게 됐다. 물론 그에 대한 소문은 이전부터 듣고 있었다. 프리 핸드로 원을 그려도 콤파스로 돌린 것 보다 더 똥그랗다거나 일주일을 자지 않아도 끄떡없다거나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겁이 난 사모님이 무섭다고 전화를 했지만 한번 털은 집에 다시 도둑이 들겠냐며 사무실에서 밤샘을 했다는 식이었다. 지금 들어보면 웃음 나는 이야기들이지만 그땐 우리 집에도 도둑이 들길 은근히 바랄만큼 크게 들렸어다. 그런 살아있는 신화가 사무실에 오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왔어, 왔어. 바로 저 사람이야. ”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사무실을 한바뀌 돌면서 내 자리에 멈췄다.

“자네가 보는 책인가?”

“예에…”

책상위에 있던 내 책을 발견한 그는 의자를 가저와서는 내 옆에 앉았다. 가만보니 부인을 도둑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았다는 무자비한 소문에 비한다면 참 잘생긴 얼굴이었다. 콧잔등은 눈자위의 아래부터 시작되어 산맥처럼 우뚝했고 무엇인가를 씹는 듯 어금니를 우물거릴 때마다 턱의 근육이 빗살처럼 움찔거렸다.

“저기요. 책을 볼 때 주로 멀 보시나요?”

느닷없는 질문을 받자 책을 덮고 지긋이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식물처럼 온순했다.

“책은 말이지 이렇게 보는 거야. 구석구석 샅샅이 봐야해. 걸레받이, 가구 그런 모두를 말야. 또 편집의 흐름도 봐야하고 사진의 배치하며 모든 것을 말야…………”

목소리도 굿이었다.

그날이후 나는 심복을 자처했다. 모두들 퇴근을 하고나면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꼴랑 밤을 샜고 을지로의 골목을 쏘다니며 순대도 사 날랐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일을 하는 동안 잠을 자지도 않았고 좀체 먹지도 않았다. 그저 다리를 꼰 채 제도판에 앉아서는 마치 땅콩을 집듯 연필의 끄트머리를 모아 쥐고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그려댔다. 대개 그 모양은 동그라미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평면인지 입면인지 혹은 자신만의 척도로 사용하는 어떤 기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동그라미들이 무수히 반복되어 그려지다가는 어느 순간이 되면 한 톨의 미련도 없다는 듯 말끔히 지워버렸다. 그리고 또 다시 그려졌다. 어찌 보면 소모적으로 보이는 반복적 행위들은 단지 그림을 그리는 것만은 아닌 듯도 했고 또 어찌 보면 생각과 몸이 따로 분리되어 움직이는 듯도 했다. 가끔은 가사 없는 노래도 중얼거렸다.

“근데 넌 왜 집에 가지 않니?”

“그냥요.”

신기하고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던 나는 집에 갈수가 없었다. 그는 쉼 없이 일을 했고 나는 쉼 없이 무언가를 물어댔다.

“건축이 무언가요?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잘 했나요? 군대 생활은 어디서하셨는지요….그럼 연앤가요? 아니면……..김중업선생은 성미가 그렇게 고약하다면서요?……”

그는 나에게 미학의 소용됨을 말했고 육안과 심안을 구분했고 감성과 이성의 차이를 말했었다. 그리고 광복과 독립의 차이를 말했고 그것의 긍국이 자유에 대한 추구이므로 독립기념관은 마땅히 그러한 이념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론 머 언 하늘을 응시하는 듯 말 했고 때론 허공을 행해 무언가를 움켜쥐듯 했으며 때론 소곤소곤 말하기도 했다. 얼마나 근사한 모습이던가.

그 당시 내가 앉는 자리는 암모니아 냄새가 가득한 청사진기계의 바로 옆이었다. 말하자면 그 사무실에서 가장 쫄병였다. 내가 하는 일은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청소를 하거나 실장이 부르면 쪼로록 달려가 청사진을 굽거나 선배들의 연필 따위를 깎는 것이 고작이었다.

“야! 김재관이 연필 이렇게밖에 못 깎겠어?”

가끔 도면을 그리기는 했다. 굴뚝이나 칠판, 목재문틀등 수십년을 묶어도 변치 않는 디테일들 말이다. 그것도 고래적 선배들이 그린 도면을 아래에 갈고 트래싱지를 덮어 베끼는 일이었다(으으 자존심 상해). 스라브 배근도를 그리는 사람은 일년 선배였고 화장실을 그리는 사람은 2년 선배였으며 단면도를 그리는 사람은 5년 선배였고 입면을 그리는 사람은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런 걸 세노라면 나의 앞날은 금새 어두워졌다. 그 런 즈음 그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에겐 이상한 힘이 있었다. 독립기념관의 작업이 중반으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여기저기서 크리틱을 왔다. 안영배. 주남철,이상해 교수등이다. 어쩌면 크리틱이라기 보다는 곽선생의 분방한 배치에 불안을 우리사무실 소장님의 사주일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것저것 딴지를 걸었는데 그 대부분이 고리타분한 전통건축을 운운하면서였다. 부석사의 꺾인 축과 마당, 처마, 하이어라키라는 말이 빈번하게 인용됐다. 한마디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곽선생께서는 자유를 말했고 인간의 심원한 의지와 건축적 감동에 대하여 말했다. 한미디로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예의상 하나 정도는 받아들일 만한데도 그들의 훈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문객들은 좋은 얼굴로 돌아갔다.

“잘해보게…”

참 희한안 일이었다. 거절을 당하고도 저렇게 기분 좋아하다니 말이다. 내가 마음속으로 그에게 박수를 보낼 그 때 그의 나이는 넉넉잡아 서른두 살 때였다. 그때 이미 ‘가직끈’ 어른이 된 것이다.

 

보쓰 Bosss

“나는 말이지 김 선생님께서 스케치를 하나 주시면 오래도록 들여다봤지. 도대체 어떤 뜻이 담겨있을까 하고 말야. 나는 그렇게 일을 해결을 했다네.”

내가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 여러 장의 스케치를 받고도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했던 내 나이 서른두 살 때였다. 선생의 말처럼 오래도록 들여다보기도 했고 두 눈을 부릅뜨기도 하고 거꾸로도 보고 뒤집어도 봤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의 화려한 서른두 살을 이미 목격했던 나로서는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겐 다부진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그로부터 스케치를 건네받지 않고 오로지 나의 생각만으로 일을 마무리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의 서른두 살 때처럼 말이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오직의 방법은 보스가 스케치를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아이디어를 미리 내는 것뿐이었다. 다행이도 새로운 프로젝트는 보통 나에게 맡겨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할 수없는 생각을 해야 했다. 만약에 그것이 어렵다고 한다면 가능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을 앞질러서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글/김재관